2007년 11월 30일
순수와의 대화
"저기요..."
어디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하다 지금 이 집에는 '나밖에 없는데...'
"헉!"
뒤를 돌아보니 왠 귀엽게 생긴 꼬맹이가 손가락을 빨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귀엽게 생겼네...자세히보니 왠지 옛날 앨범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어렸었던 나와 비슷하게 생겼다.
"사랑은 돌고 도나요?"
뭐냐, 저 어이없는 질문은 아무리봐도 세살박이 정도밖에 안되는 놈이 사랑타령을 하다니, 이제 막 20대가 된 나도 사랑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하거늘... 뭐, 어쨌든 잘 구슬리고 타일려서 집에 돌려보내야겠다.
"사랑은 돌고 돈단다."
헉! 내가 어린아이한테 무슨 말을 하는거야... '사랑은 변하지 않는단다, 꼬맹아' 라고 말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파출소에 데려갈려고 했는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사람이 돌고 도는데, 사랑이 돌고 돌지 않겠어?"
으아아아악! 머냐 왜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이 그냥 입에서 술술 나오는거냔 말이냐! 뭐냐, 이 꼬맹이는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아니면 정말 이 세상에 마법이 있는거야? 응? 왜 내 속마음이 그냥 술술 나오는거냐구! 그러고보니 이 꼬맹이 어디서 들어왔지... 난 분명히 문단속을 철저히 한단말이다!!!
"정말인가요?"
꼬맹이는 놀란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는 듯이 쪽쪽 빨던 손가락을 입에서 빼고 손으로 침을 닦았다.
"정말... 사랑이 돌고 도나요?"
아까와 같은 똑같은 질문. 난 이번에 정말 '사랑은 변하지 않는단다 꼬맹아'라고 말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역시 아직 어리구나, 정 그렇게 못 믿겠으면 그럼 그렇게 한 번 믿고 살아봐라. 그렇게 믿어서 상처받고 이리치이고 저리치여서 찌그러지고 자빠져서 땅이 꺼져라고 울고 그러다가 우연한 만남에 실실 웃어보면 뭔가 아릿한 것을 얻을꺼야."
하아, 내가 정말 미쳤나? 이딴 꼬맹이한테 내 속마음을 시원하게 다 말하다니... 뭐냐 이 꼬맹이는 진짜? 난 문단속 철저히 하는데... 우리집 문단속만큼마냥 단단하게 내 마음의 문단속도 철저한단말이다! 왜 이딴 꼬맹이한테 무너지는거지... 내가! 내가 왜...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흐에에에엥!"
내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꼬맹이는 울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조금 전 내 말처럼 찌그러지고 자빠져서 울기 시작했다.
"..."
푸핫, 내가 정말 미쳤나보다. 이번에도 '사랑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할려고 했는데 입에서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아무래도 이제 인정해야겠다. 난 지금 사랑타령하는 발랑까진 세살박이한테 무너졌다.
"지금은 그렇게 믿는 게 좋을꺼야... 하지만 언젠가는 후회하겠지."
난 또다시 꼬맹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나서 손수건을 꺼내 꼬맹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꼬맹이는 내 손길이 싫은지 내 손을 그 작고 여린 손으로 치며 더 서럽게 울었다.
"사랑은...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단 말이에요!"
뭐...뭐냐? 무슨 소리지? 어이, 사랑타령 꼬맹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란 말이다!
"변하지 않아요!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당신은 내가 여기 어떻게 왔는지 모르죠? 당신은 왜 나에게 속마음을 터놓는지 모르죠? 난 당신의 순수란 말이에요! 그래서 순수를 믿고 있던 당신에게 난 찾아갈 수 있었고, 당신은 순수인 나에게 속마음을 털 수 있었어요! 난... 난... 당신의 속마음이 순수를 믿을 줄 알았는데... 당신을 찾아갈 수 있을정도로 당신은 순수할 줄 알았는데..."
"짝!"
그 말에 난 꼬맹이의 뺨을 때리고 사악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꼬맹이?"
...
"난 이제 순수를 믿기엔 글렀어. 알아들어? 이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기엔 이미 늦었다구... 내가 순수를 찾았다고? 순수를 믿고 있었다고? 그래, 그랬어! 한 때는 그렇게 믿었어! 그것하나만 믿고 달려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서 또 달려가다 쓰러지고! 그러길 반복하다가 이제는 지쳐 쓰러졌다고! 그래서 이제 그딴 것들을 잊고 버렸단다. 한참 오래전에 그랬단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아."
꼬맹이는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날 올려보았다. 그 큰 눈을 보고, 너무나도 맑고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난 경멸하기 시작했다. 마치 더러운 오물을 보는 듯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그렇군요. 당신은 변했군요."
꼬맹이는 조금의 울음성이 섞이지 않은 너무나도 무표정한 말을 하였다.
"순수를 믿었던 당신은 역시 변했어요. 직접 찾아가길 잘한것 같네요.큭큭큭..."
꼬맹이는 꼬맹이답지않게 찌질거리지 않고 자조적인 웃음을 띄었다.
"당신이 그렇게 만나고싶고 갈망하던 순수를... 저를... 마치 쓰레기처럼 여기시다니... 큭큭큭! 역시 당신은 변했어! 이제 당신은 나따위를 믿지 않겠지?"
꼬맹이는 점점 뿌옇게 구름처럼 뿌옇게 흐려지더니 연기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건가? 나의 순수라고 하던 그 꼬맹이가 사라지는건가? 내가 이제 순수를 믿지않기 때문에 사라지는건가? 가라! 사라져라! 이제 너따위는 믿지 않아!
결국 이제 너무 뿌옇게 흐려서 보이지도 않게된 꼬맹이, 순수... 난 순수에게 작별을 고했다. 꺼져라!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라! 더는 내 눈앞에서 나타나지 말아라!
"...!"
꼬맹이는... 순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순수는 뿌옇게 흐려지면서 점점 커져갔다. 그러더니 점점 구체화되더니 나와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모습... 지금의 나와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 내 눈앞에 서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변해야겠죠?"
순수는 나와 똑같은 잔인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내가 때린 곳과 똑같은 곳에 똑같이 내 뺨을 때렸다.
"짝!"
"더러운 오물같은 당신을 위해 한마디만 할께요.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이... 이 꼬맹이가!
"뿌우우우우우우웅!!!"
가스레인지에 올려놨던 주전자에서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순수는 그 연기에 맞으며 조금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뭐지, 내가 환상을 본 건가... 아니면 정말 순수를 본 건가...
"내가 미쳤지. 헛것이나 보고말이야... 컵라면이나 먹어야겠군."
# by | 2007/11/30 22:29 | 심각한 화이트골렘 | 트랙백




